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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메이커 - 500년을 건너온 유리 한 조각의 시간

책 리뷰

by 채널나인 2026. 2. 1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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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생각납니다.

단 한 점의 그림에서 출발해 인간의 욕망과 예술가의 고독, 그리고 시대의 공기를 길어 올렸던 작가이지요.

그런 작가가 이번에는 붓 대신 유리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무려 500여 년의 시간을 품은 베네치아, 그중에서도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가 이야기라니요.

책을 펼치기도 전에 신비로운 분위기와 매력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번 작품 <글래스메이커>는 한 여인의 삶을 따라가며 베네치아 유리 산업의 흥망성쇠, 그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노동과 사랑,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직업을 돌아보는 소설이 아니라,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결코 쉽게 깨지지 않는 인간의 시간을 다룬 이야기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치는 단연 ‘시간의 왜곡’입니다.

주인공 오르솔라와 그 주변 인물들만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고, 세상은 500년이라는 세월을 성큼성큼 건너뜁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몇 장만 넘기면 작가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페스트가 휩쓸던 시대에서 코로나를 겪는 현대까지, 편지에서 전화로, 다시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로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도 오르솔라는 여전히 유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느린 시간 덕분에 독자는 베네치아 유리 산업의 긴 호흡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장인의 삶이 얼마나 오랜 축적 위에 서 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긴 시간을 다루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풀어내는 능력은 역시 트레이시 슈발리에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분량만 보면 제법 두툼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페이지가 아니라 유리판이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무라노 섬의 유리공방, 뜨겁게 달아오른 용광로, 장인들의 손끝에서 형태를 갖춰가는 유리들….

묘사가 워낙 생생해 마치 공방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답게 곤돌라가 오가는 풍경, 섬과 섬 사이의 미묘한 경쟁, 그리고 독창적인 유리 제품을 만들기 위한 장인들의 집요한 노력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오르솔라는 그 시대의 여성에게 씌워진 편견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유리공예는 남성의 영역이라는 인식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만의 기법을 완성하고 결국 집안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인물이 됩니다.

이 과정이 과장되거나 영웅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 점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성공의 순간보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다시 유리 앞에 서는 반복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르솔라의 성취는 더욱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여기에 끝내 완성되지 못한 사랑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한 여인의 삶을 통해 거대한 사회의 흐름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이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대학생 시절 배낭여행으로 베네치아를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바라보았던 물 위의 도시, 그리고 무라노 섬에서 보았던 유리공예의 신비로움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시 떠올랐습니다.

유리는 아름답지만 쉽게 깨질 것 같고, 장인은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오르솔라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장인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읽고 나서 한동안 유리컵 하나를 집어 들고도 괜히 오래 들여다보게 되더라구요.

“이 안엔 몇 년의 시간이 들어 있을까?”

<글래스메이커>는 예술과 노동, 사랑과 시간이라는 다소 묵직한 주제를 유리처럼 맑고 섬세하게 풀어낸 소설이었습니다.

베네치아라는 도시가 지닌 매력과 유리공예라는 세계를 한 여인의 삶에 녹여낸 솜씨가 인상 깊었고, 읽는 동안 여러 번 감탄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조용히 오래 여운이 남는 소설을 찾고 계신 분들께 특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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