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출장으로 대만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제게 대만은 영화 [청설], [나의 소녀시대] 같은 멜로 영화를 참 잘 만드는 나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가보니 영화 속 감성처럼 도시 전체가 조용하고 깨끗해서, ‘아, 역시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군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이 된 단수이 지역을 걸어보기도 하고, 스린 야시장에서 끝도 없이 늘어선 먹거리에 정신을 잃을 뻔한 기억도 납니다.
펑리수를 사기 위해 유명한 가게에 들러 선물용으로 한가득 사 들고, 길을 헤매면 어김없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던 사람들 덕분에 마음까지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안문석의 <범생 공화국, 대만>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그래, 내가 알던 그 대만이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딱 범생, 딱 모범, 딱 성실.
좋은 의미로요.
이 책은 저자가 대만 정부가 주관하는 ‘타이완 펠로우십(Fellowship in Taiwan)’ 프로그램을 통해 국립대만대학에서 약 7개월간 머물며 보고 느낀 대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학술 보고서처럼 딱딱하게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나열하지 않고, 생활 속 에피소드로 풀어내는 방식이 재미있었습니다.
덕분에 읽는 내내 나도 저런 모습을 본 것 같아 더 몰입하며 볼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작은 풍경에서 출발해 대만의 역사와 사람들의 성향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글은, 대만을 잘 모르는 분들께도 부담 없이 다가옵니다.
중국과의 가슴 아픈 전쟁의 역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교류의 모습에서는 작은 나라가 선택한 실용주의의 단단함도 느껴졌습니다.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술술 읽히는 건, 저자의 유머와 관찰력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대만 경제 이야기였습니다.
세계 경제가 요동치는 와중에도 대만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TSMC가 있습니다.
아시아 기업 중 시가총액 1위, 대만 전체 수출의 약 12%를 책임지는 기업이라니 ‘대만의 수호신’이라는 별명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성공의 배경으로 인재 양성 시스템과, 그 시스템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짚어냅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반도체 분야로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그 인재들이 한 회사에서 꾸준히 역량을 쌓아가는 모습.
여기에 대만 특유의 ‘범생 문화’가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 무척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화려함보다는 성실함, 요령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한 태도가 결국 나라의 경쟁력이 된 셈이지요.
경제 이야기만 나오는 책이었다면 다소 딱딱했을 텐데, 이 책은 생활 문화 이야기도 놓치지 않습니다.
베트남보다 오토바이가 더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오토바이를 배려한 교통체계는 “아, 이건 정말 배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대만의 쓰레기 배출 시스템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음악을 틀며 지나가는 쓰레기차, 그 소리에 맞춰 주민들이 직접 쓰레기를 들고 나오는 풍경은 처음엔 낯설지만, 곧 ‘아, 이래서 도시가 깨끗하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범생스러움이 이렇게 생활의 편리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대만과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를 겪었고, 경제 수준도 비슷하며, 출산율이 낮아 고민하는 처지까지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분명 다른 점이 많지만, 그 차이 속에서 배울 점 또한 분명히 보입니다.
대만의 장점은 배우고, 우리는 우리의 강점을 더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대만 소개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를 거울 삼아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나라, 범생 같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대만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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